푸른돌조사단의 개발이야기
오랜만입니다! 애독자여러분.
언제부터인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단문 쓰기 서비스가 발달하면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긴 글로 올리는 일의 횟수가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저도 이 곳에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쉬었었네요. 그 몇 년 동안 비주얼샤워에는 많은 일이 있었고 결과로 개발력은 폭풍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사내,외적으로 공유하지 못하다보니 저 혼자의 머릿속에 머물다 기억이 증발할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른 중반을 넘어가는 시점이라 즉흥적으로 글을 쓰기에 무거워지는 나이를 뒤로 하고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현재 시점에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판단을 글을 통해 남겨두려 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해주시는 “푸른돌조사단”이 발매된지도 반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기에 푸른돌조사단의 제작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 풀어보는 것을 주제로 정했습니다.
“푸른돌조사단” 프로젝트의 시작은 이랬습니다.
이곳 웹페이지에도 후기가 올려져 있는 내용입니다만 2012년 미국에서 열린 GDC에서 한 일본 회사의 재미있는 발표를 듣게 됩니다. 그 내용인즉 일본에서 그 당시 히트하고 있는 카드게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즉 개발이 정말 쉬운) 게임인 것처럼 보이지만, 직접 해외 게임들이 막상 일본 시장을 타겟으로 제품을 개발해 출시해보면 정말 뼈저린 실패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성 세미나였습니다. 그 당시에 한국에는 그런 카드게임이 전무했고, 미국에서는 바하무트라고 하는 게임이 히트하기 전으로 일본에서만 유일하게 그런 카드 게임이 매출을 내고 있는 기괴한 상황(갈라파고스 성향?)이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카드게임은 정말 정교하게 발전한 RPG게임의 최신버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RPG게임이 가진 게임성의 최말단, 즉 심미적 아이템의 획득과 극도의 레벨링이라는 두 가지가 심플하면서도 견고하게 남아있는 제품이라는 점을 먼저 눈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두 가지는 모두 일본 게임 시장에 극도로 발전시킨 분야였기 때문에 이런 우리의 경험을 무시하고 비슷하게 겉보기만 따라했다가는 참패하게 될 것이라는 흐름의 논리였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형태의 게임이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성공한 것에 이유가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잘 만들어진 게임은 언제나 유저의 사랑을 받는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비추어보면 일본의 그들이 잘하는 부분을 극대화 한 그런 형태의 게임은 당연히 잘 만들어졌을 것이고 상응하는 시장에서의 반응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2004년도 일본 피처폰 시장부터 비주얼샤워는 일본 시장을 모니터링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때로는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의를 빌려서 현지에 전화기를 개통해 피쳐폰 게임을 잔뜩 받아오는 출장을 정기적으로 다녔고(현재도 일본 단말들이 사내에 남아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넘어와서는 일본 앱스토어의 리딤카드를 사러 출장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를 얼마는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피쳐폰이라고 하는 구식 전화기가 당시에도 이미 꽤나 높은 해상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인터넷까지 지원되는 상황이었고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구색이 맞는 게임구현이 가능했기 때문에 개발적 측면에서 꽤나 그 깊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발표를 들은 후 한계를 인정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가능성도 보았습니다. 그 당시 일본 카드게임들의 조악한 UX를 혁신하고 새로운 경험을 부여할 수 있다면 일본 시장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장르의 카드 게임을 만들수 있지 않을까?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분명 해외 시장에서도 순차적으로 해당 장르의 게임이 선전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예측이었습니다. 하지만 뜬 게임의 프레임워크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비주얼샤워의 창작의지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때 당시 비주얼샤워에서 잘하는 것은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1인칭 어드벤처이었고, 이왕 기존의 카드 게임에 새로운 것을 섞기로 한다면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과 섞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계 최초의 “시네마틱 카드게임” 푸른돌 조사단이 탄생하게 됩니다.
한번 “시네마틱”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좀 더 들여다 보겠습니다. 2009년 “하얀섬”을 시작으로 그 동안 만들어온 10여종의 시네마틱 어드벤처 게임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시네마틱”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중 하나는 몰입감입니다. 영화관에서 좋은 영화 한편을 끝까지 보는 동안은 몰입감이 흐트러지지 않듯이 좋은 시네마틱 게임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몰입감이 필요합니다. 이는 보통 그래픽과 시나리오, 사운드 세 축에서 결정이 됩니다. 그래픽 쪽에서는 정지된 따분한 화면을 대체할 역동적이고 화려한 영상이 필요하고, 사운드는 품질 자체도 높아야 할 뿐 아니라 화면과 어울리는 환경 소리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나리오가 몰입감을 크게 좌우합니다. 예를 들자면 똑같은 어두운 방에 홀로 있는 영상이 출력되고 있더라도, 이 어두운 방은 누군가 나를 가둔 곳이고 나는 내 잘못들로 인해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는 네러티브가 부여되는 순간 엄청난 몰입감의 차이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당시 너무나도 정적인 카드게임에 어떻게 하면 그런 시네마틱의 요소를 넣으면서 몰입감을 훼손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가장 길고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듯한 오프닝 영상 하나로 게임을 시작하기만 하면 몰입감이 높아질것인가? 또 만들어진 몰입감이라는 요소가 카드게임의 중심인 각 카드들과 어떻게 영향을 끼치며 조화롭게 게임 내에서 버무려질 수 있을까? 이것들이 주요한 토픽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세계 최초의 시네마틱 모바일게임을 만든 회사 답게 꽤나 심도있는 고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임 플레이와 시네마틱을 연결하기 위해서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보통 카드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은 기존의 온라인RPG들이 가지고 있는 반복적인 플레이 특성을 유지하기에 여건 상 힘든 사람들입니다.(혹은 다른 그런 게임들을 플레이해야 하기에 모바일 게임을 할 시간이 나지 않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도한 몰입감 확보 전략은 우리가 카드게임의 틀을 유지하는데 큰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1시간씩 몰입해서 진행해야 하는 “화이트아일랜드” 같은 게임에서 사용되는 몰입장치와 카드게임에서 사용되는 몰입장치의 설계가 달라야 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한번에 사람들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글자의 수, 문단의 수부터 한번에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의 양과 같이 시네마틱 게임의 기초가 되는 이야기 전달 부분부터 다시 설계 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계속 “카드게임”이라는 명칭이 좀 어설픈데요, 저희는 “푸른돌조사단”과 같은 제품 장르를 일본식으로 “C&B”라고 부릅니다. Collection & Battle의 약어입니다. 게임의 큰 축인 모으고 싸운다는 두 가지 부분을 그대로 잘 가져온 장르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호칭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생소하신 여러분들을 위해 예를 들어드리자면 이런 장르의 대표작으로는 “포켓몬스터”가 있겠습니다. 이름에서 들어나듯 이런 C&B제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얼마나 “모으고 싶게(Possesiveness)” 만들수 있는가 입니다. 일단 모으고 싶다는 느낌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게임의 시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소유욕이라는 느낌은 대상물에 대한 애착으로 부터 발현되고, 이 애착은 다시 그 대상물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금이 금인지 모르는 갓난아이들에게는 금에 대한 소유욕이 없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저들이 얻고자 하는 카드를 만들기 위해서 각 카드들의 정보를 이해시키는데 주력하기로 했습니다.
“푸른돌조사단”에서 이 목표는 절반의 성공이었습니다. 시나리오를 접목하는 방법으로 각 카드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전달할 수 있있고, 유저들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카드들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저희는 서비스 중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시나리오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카드들(라나, 네네, 불을 삼킨 자)을 실제로 한정 기간동안 판매한다면 얼마나 유저들이 원할까? 라는 실험이었습니다. 그 결과, 유저들은 극적으로 구입을 원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유저들이 그 카드의 판매 기간 동안 카드를 얻기 위한 과금을 진행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왜 절반의 성공이었을까요? 우리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10년 가까이 연구 개발했던 “시네마틱”에 있지 않았습니다. 역시 처음 해보는 다른 부분인 C&B게임의 프레임워크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C&B제품의 핵심은 모으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진 카드로 상대방과 어떻게 싸우면 될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 내가 왜 지는지에 대한 룰이 분명하게 들어나야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싸우기 전이라도 상대방의 카드와 내 카드들을 모두 볼 수 있다면 이길지 질지를 분명히 알 수 있도록(포커게임처럼) 규칙이 잘 설계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실수를 합니다. 첫째로 상대방과 내 카드의 정보를 모두 미리 보여주는 실수를 했고(상대방 패를 오픈하고 포커를 치는 느낌처럼), 두 번째는 해당 정보를 모두 미리 공개해놓고도(바로 이 부분이 실수이지만) 승패를 백전백승으로 예측할 수 없도록 해 게임에서의 좌절과 극복이라는 게이밍의 기본 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정보를 알아도 이길지 질지 모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 게임의 프레임워크 제작 작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른 게임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먼저 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드는 장르에서 남을 넘어서는 결과물을 만들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해당 부분의 전체 작업을 맡았던 책임자는 당연하게도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게임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초기 결정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제품의 결과를 분석하고 살펴보지 않으면서 만일 처음부터 우리만의 새로운 생각으로 복잡하게 진화된 시스템을 창작하려 들었다면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고, 나머지 소유욕에 대한 부분까지도 검증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는 더 잘할 수 있으니까요. 계속 마음이 불편한 저 문제있는 부분을 그렇다면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를 “푸른돌조사단” 출시 버전 개발 완료 이후부터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품을 분석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왜 다른제품들도 저 위치까지 밖에 도달하지 못하는지를 분석하고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분명 답이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전작보다 훨씬 다이나믹한 시네마틱 연출, 스토리와의 연결성이 더 짜임새 있어진 구성, 흥미를 끄는 시나리오 작업, 세계관과 연결되는 수준을 넘어 세계관을 보여주는 능력을 지닌 그래픽 디자인 등 확실히 다양한 부분에서 “푸른돌조사단”은 비주얼샤워의 현재까지의 개발 능력이 집대성 된 제품임은 틀림없지만, 여기에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고, 실패도 많겠죠, 하지만 이곳부터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니라 우리가 길을 만들며 나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느낍니다. “시네마틱”이라는 단어를 모바일 게임에 처음 끌고 왔던 그 때 처럼 말이죠. 저희의 게임 제작은 매 순간 현재 진행형입니다. 도전을 멈출 수 없습니다.
by Kay Park